좋아요2011. 11. 1. 16:28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처음으로 보고 말았다.


영화 허니와 클로버에 나오는 대사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라니. 그 단어가 주는 끌림에 홀딱 반해서 그 이후로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언제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마음에 담아두는 버릇이 생겼다. 예를 들면 눈치 없이 자기 말만 하는 친구를 피해 딴 생각을 하다 다른 친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을 반달모양으로 만들며 웃는 누군가의 사진을 본 그 날, 내가 부르는 소리에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는 우리집 강아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뭐 그런거.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감정이란 건 의외의 순간에 언제나 갑자기, 별다른 이유없이 다가온다.


버스커버스커에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을 떠올려 봤다. 언제였을까. 생각이 났다.

Livin' la vida loca 생방송 무대. 흥미롭게도 발음 때문에 김치마틴이라는 별명과 노래하다 침까지 흘려서 침범준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바로 그 무대다. 사실 그 전까지는 이 팀에 관심도 없었다. 탑11이 되었을 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동경소녀 무대에 기타소리가 안 난 것도,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석연찮은 표정으로 노래를 마치고 내려온 것도 그때는 몰랐을 정도로. 음원이 대박났다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보지도 않았으니까.


Livin' la vida loca를 부른다고 하길래 노래 시작도 안했는데 내심 '이 팀 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년간 오디션 프로그램을 애청해온 내 나름의 무학(無學)의 통찰에 의하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피해야 할 종류의 곡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룹의 노래를 혼자서 부르는 것, 특히나 세밀하게 파트가 분할되어있고 쉴틈없이 치고 나오는 아이돌 그룹의 노래. (그래서 신지수가 '길'을 부른다고 하길래 '아, 안되는데' 라고 생각했었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김태우 노래도 여간해선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운 것 같고, 박진영의 스윙베이비는 어디선가 박진영 본인이 이 노래는 오디션에서 부르면 안된다는 얘기를 했던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대충 공통점을 찾자면 원곡만큼 노래의 맛을 살리기가 쉽지 않은 노래 정도로 요약이 되려나.
 
Livin' la vida loca도 그런 곡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너무 유명하지 않은가. 후렴구도 코러스 감안하더라도 쉴새없이 불러야 하고. 게다가 보컬 본인이 영어노래 잘 모르는데 이 노래는 안다고 말하는 순간 '아는 노래가 이거밖에 없어서 선곡한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내 머리속에서는 벌써 탈락까지 갔다. 

그런데 어라? 막상 노래가 시작되니 나름대로 괜찮은 거다. 그래서 이 팀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번 본 영상을 보고 또 보고 하는데, 보컬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표정. 이 무대 도입부를 자세히 들어보면 '아, 안나오는데'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동경소녀 때도 그러더니 이 때도 초반부에는 기타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기타소리가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런 표정을 지어보인다.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는 아이의 표정이었다. 저렇게 해맑은 미소를 봤던게 언제였던가. (발캡처, 영상으로 봤을 때 내가 느낀 그 정확한 표정을 못 찝어내겠다. 엉엉) 




이건 리빈라비다 로카 아아아- 할 때 표정. 너무 열심히 부른 나머지 침까지 흘린 직후다.


발음도 엉망이고(츀키츀키 모카는 뭐냐.) 혹자가 에라 모르겠다라고 표현했던 삑사리도 냈으면서, 뒤로 갈수록 마구마구 빨라져서 드럼 속도에 따라가기 바쁘면서 너무너무 신나 죽겠다는 이 표정은 뭘까. 너무 부러웠다. 내가 이제껏 찾지 못한 무언가를 스물 세 살의 저 아이는 이미 찾았고,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바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 녀석이 미친듯이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이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 모았다.


더 알아낼수록 흥미로웠다. 지역예술을 걱정하는 기특한 청년, 놀라운 그림솜씨, 지금 당장 앨범하나 뚝딱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자작곡 레퍼토리. 흔적을 따라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몇 년만에 팬까페에 가입해있고, 음원을 다운 받아 무한루프하고 있고, 자작곡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다음 방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들어오니 출구가 없다. 큰일이다.


이 그룹이 20대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이유는 이런점 때문이 아닐까. 나는 어렸을 때는 공부만 잘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면 앞길이 술술 열릴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점수에 맞춰서,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온 대학을 졸업 할 때가 되어보니 우리를 수식하는 말은 '88만원 세대'다. 남보다 나은,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무언가를 이루려 달려오다 보니 정작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는 잊어버렸다. 아니 그런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남들 하는대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엔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면서 어영부영 다른 사람 뒤를 똑같이 따라갔다.

그런데 이 청년들은 나와는 다르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잘하기 까지 한다. 그리고 본인이 충분히 즐기고 있다. 나는 현실에 매여 아둥바둥하고 있는데 이들은 현실을 초월한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청년 사업 기획서를 아이디어로 빼곡히 채울 수 있는 장범준이 너무너무 부럽다. 드러머가 되겠다며 강사자리를 내어 놓을 수 있는 브래드의 용기가 부럽다. 베이스 하지 않을래 라는 권유에 흔쾌히 그러자고 승낙할 수 있는 김형태가 부럽다. 부러워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동시에 나는 이들의 지금 모습을 지켜주고 싶다. 그저 TV로 보고, 노래를 듣는 팬의 한 명일 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지켜주고 싶다. 이들이 지금 모습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된다. 자꾸 우승은 안 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몇몇 팬들의 발언은 이런 걱정에서 나오는것이라 생각한다. 



쓰다보니 이야기가 산으로 간 감이 있지만,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들이 이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단순히 운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굉장한 편곡실력은 고3 때부터 차근차근히 쌓아온 자작곡 레퍼토리가 있기 때문에 빛을 발하는 것이고 (아마추어 밴드가 이정도로 탄탄한 자작곡 레퍼토리가 있는 것은 흔치 않을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새벽까지 하루 종일 버스킹을 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돌발 상황이 닥치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막걸리나 무대를 기점으로 팬들사이에서 장범준은 천재인것 같다는 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천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칭찬은 되려 독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팀은 엄청난 노력을 기반으로 도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지만 밤새워 연습하던 그날들의 노력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막걸리나' 보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무대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흘간이나 드라마 촬영을 해서 연습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높기로 유명한 곡을 나름대로 잘 편곡하고, 원곡에 없던 멜로디라인까지 만들어서 삽입하고, 밴드 호흡까지 잘 맞추어 낸다. 이건 천재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본기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이 팀이 정말 잘 되길 바란다. 음악적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팀의 개성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대중문화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길 바란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다른 사람에게도 용기를 주길 바란다. 그 성공이 프로그램 우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 이후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경연에서 보여주는 커버곡이 아니라 진짜 이들의 언어로 된 노래로 가득한 앨범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해줄 준비가 되어있다.


Posted by 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