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2011. 8. 3. 13:20

7년의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정유정 (은행나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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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진실,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못 본 체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라는 영장류의 천성일지도 몰랐다. 361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474





아무리 도서관 홈페이지를 기웃거려도 예약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홧김에 구매.
이 책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배송상자에서 꺼내들면서 책이 제법 묵직하다고 생각했다.
읽고나니 책의 무게에 온 몸이 눌린 느낌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다소 불친절하고 충격적인 첫 문장과는 달리 '살인마'의 아들에게 쏟아지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매력적이다.

어둠과 안개가 주변을 둘러싼듯한 느낌이 책장을 덮고서도 한참동안 가시지 않는다.

책을 읽고나서는 지금 내가 느끼는 느낌 그대로 박제를 해놓고 싶었다.
이 느낌이 날아갈까 입을 열어 말을 하기가 꺼려졌다.

속도감이 넘치지도, 소름이 돋을만큼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대신에 서서히 옥죄어 드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재미있었지만 작가의 머릿속에 구현되는 장면이 내 머리속에서는 잘 구현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 심장을 쏴라'에 와서야 비로소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 내 눈 앞에도 어느정도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7년의 밤'을 만나보니 머릿속으로 그린다는 의식조차 없이 어느새 스르르- 주변에 안개가 드리운 느낌이다.


혹자는 소설 속의 영제가, 혹은 승환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평을 하기도 하나보다.
그런데 나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그런 생각이 한차례도 들지 않았다.
이미 우리 주변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넘쳐나고, 허구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존재하기도 하니까.
영제, 승환, 현수, 서원, 세령, 하영, 은주.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미 책의 내용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배경은 세령마을. 그리고 세령호.


책을 읽다보니 아무래도 모티브가 된 지역이 있을 것 같았다. 백프로 가상공간이라기엔 그 설명이 너무 상세하기도 하고, 보성, 장흥, 해남 같은 지역은 실제 지명이 나오기도 하니까.  궁금해져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장흥의 탐진댐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글도 봤다. 그러나 계속 읽다보니 탐진댐이라기에는 조금 어색한 부분이 몇군데 있었다.(장흥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나오기도 하고, 아무래도 순천으로 추정되는 호수 근처의 S시의 존재 등) 의문은 권말에 작가의 말에 나오는 J댐이라는 단어에 스르르 풀렸다.



바로 주암댐.

그리고 우연히도, 내가 태어났을 당시 살던 마을이 바로 그 댐으로 인해 물 밑에 잠겨있다.

 




 











주암댐. 책에 삽입된 지도의 댐 그림과 유사해 보이기도.




영아기를 보낸 마을이라 기억은 전혀 없지만 주변을 지날 때 마다 묘한 감정이 들곤 했다.
책을 읽고나니 내가 태어났던 마을도 아틀란티스가 되어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아련해졌다. 


이렇듯 정유정작가의 작품의 배경이 주로 광주, 전남인 것도 내가 그녀의 책을 읽는 큰 요인이다.
그녀는 5.18을 이야기 하고, 그녀의 책엔 득량도가 자주 등장한다.
(득량도는 보성과 고흥의 바다 사이에 있는 섬으로, 맑은 날이면 지금 우리집 거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녀의 글 곳곳에 내가 살던 곳이, 가족들과 여행했던 곳들이, 학창시절 소풍갔던 곳들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광주, 전남지역을 속속들이 잘 알고있고, 이해하고 있고,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의 글은 서울에 살면서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단비를 내려준다.



작가는 모티브가 된 곳의 실제 지명을 밝히면 논란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모양이던데
글쎄, 실제 살인사건도 영화로 찍어가서 개봉한 마당에 허구의 이야기로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오히려 관광상품 개발에 혈안이 된 전남 지자체들의 특성상 수년 내에 주암댐 근처에 '7년의 밤 여행상품'을 개발해 내지 않을까가 더 걱정이다. 집에 내려가면 유명해지기 전에 둘러봐야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우연히 정유정작가의 작품을 출간순서대로 읽었다.
열한 살도 아닌 마당에 열한 살 정은이를 읽고 펑펑 울었던 중학생이 20대의 중반이 되어 그 작가를 다시 만났다.
작가는 1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보다 더 어마어마한 이야기꾼이 되어 내놓는 작품마다 계단을 대여섯개씩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은 어떨까. 기대되는만큼 두렵다.



책머리에 지도가 첨부되어있어 이해를 도와준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정작 중요한 사택부분이 딱 중간이라서 책을 주리를 틀어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읽다가 위치를 확인하려면 다시 앞 장을 여는게 불편하다는 점 정도?
(은행나무 출판사에 북스피어의 책표지 안쪽 활용이라는 아이디어를 살짝 알려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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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