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2013. 10. 9. 16:37

28

 

   

28 - 8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

 

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진경이 그걸 너무 서운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열일 젖혀두고 달려가지 않는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 바랐다. P.183

 

빨간 눈은 지옥 불처럼 화양을 태웠다. 용케 불길을 피한 이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약탈, 총질, 강간, 살인, 방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일들이 매일, 매 순간, 도처에서 일어났다. 서로 죽이고 죽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공포에 떨며 고속으로 공멸해갔다. 남은 자들은 서로를 피해 가시 세계 밑에 숨어 지냈다. p.473

 

 

※ 내용 중에 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몰라요.

 

 

정유정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진작에 들었다. 그리고 기세 좋게 팔려나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바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기도 해서 선뜻 읽지 못했다.

 

걱정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신작이 <7년의 밤>보다 실망스럽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 이었을까. 뒤늦게 <28>을 읽고 나니 그런 걱정은 역시 기우였다.

 

 

분명히 상황은 더 지옥 같은데 전작보다 가독성은 더 좋아졌다. 읽는 이를 옥죄어 책을 읽다가 어깨가 뻐근해지는 경험을 하게 했던 전작보다 훨씬 담담하다. 초반부는 (영화를 포함하여) 재난을 다루는 다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지만 다 읽고나면 역시 정유정은 다른 면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나 늑대개 링고의 시점이 인상적이다. 책이기에 가능한 묘사. 대체 불가능한 이 작품의 매력포인트이다.

 

<28>은 '개'를 대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라고 말하는 듯한 마야의 다갈색 눈동자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서재형, 아름이라는 이름의 맹인 안내견을 친구로 생각했던 승아, 동물학대-야뇨증-방화 3단 콤보를 시전하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으로 개를 아버지에게 못한 화풀이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박동해, 아내와 딸을 잃고 개를 증오하게 된 기준, 그리고 애초에 동물에는 별다른 관심조차 없었지만 구덩이에 생매장당하는 개를 보고 각성하게 되는 윤주까지. 작가는 각각의 태도에 대해 비난도 계몽도 하지 않는다. 다만 종국에는 개도 사람도 같은 처지가 될 뿐.  

 

이번 작품은 책을 덮고도 등장인물들의 다른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고기리 촌닭집' 딸 윤주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수진의 쌍둥이 남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형사 박주환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특히 박주환 형사는 다른 작품에 까메오로라도 다시 등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7년의 밤>을 보고 나서도 느꼈지만 우연히 <열한 살 정은이>를 읽게 된 것은 참 행운인 것 같다. (정유정의 글을 출간 순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매번 더 좋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정유정 작가는 이제 '믿고 보는 작가' 리스트 상위권에 안착. 다음 번 작품은 고민없이 집어들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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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선♪